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인다.
달나라에 다녀온 암스트롱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달에 가서 무얼 보고 왔는가’“지구가 아름답다는 것을
보고 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 그 지구가 아름답고 소중한 별이라는 것을 보기 위해서, 지구에서
멀리 떨어져 나와 달나라까지 가서야 볼 수 있었다.
오늘 복음을 ‘너
자신을 알라‘로 읽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지만, 누구나 다 배우고 나면 수승처럼
될 것이다.”이라는 말씀이 어렵다. 혹 너희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알려준다고 하여 이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마치 하느님의 뜻을 전부 아는 것처럼 위선 떨지 말라고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특히 본당신부로 살면서 하느님을 선포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음을 고백 한다. 따라서
이 말씀을 사제라 하여 신자들을 가르치려고만 들지 말고 부단히 노력하여 네 자신부터 말과 행동을 같게 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야 된다는 뜻으로 들려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다 배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졸업해도 하느님에 대해 다배우지 못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모두 배우지 못했다. 설익은 지식으로 그나마 하느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지식으로 사람을 가르치려는 모습이 신자들에게 꼴불견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걱정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처럼 되려면 한참 멀었지만, 가르쳐야 하는 내 처지가 불안스럽다.
‘내로남불’즉,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뜻의 줄임 말이 있다. “남이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못했다면 바쁘고 많은 일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남이 다른 사람에 대해 말하면 말 많은 수다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건설적인 비판을 한다고 생각한다. 남이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하다고 생각 한다. 남이 내게
친절하게 대하면 뭔가 필요하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유쾌하고 좋은 성격 때문이라
생각한다. 남과 내가 이리 다르니 얼마나 힘든 세상일까? 다른
사람을 보는 눈과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이토록 다르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잘 드러내지만 얼마나 웃기며 슬픈 현실인지 모르겠다. (요새말로 웃픈현실)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자기 자신에게 큰 허물이 있는데, 남의
작은 허물을 고치려는 위선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이에게 충고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충고 한마디라도 하려면 그보다 먼저 두세 차례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보라는
뜻으로 읽으면 더 큰 의미가 있다. 진정한 자기 성찰 없이 참된
충고나 가르침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제 탓이오.” “제 탓이오, 제 큰탓이옵니다.”라는 고백이 일상생활에서 이루어지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많은 경우에 “네 탓이요, 네 탓“을 외치며 억울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말은 청산유수인데 삶이 뒷받침 되지 못하여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을
가끔씩 본다. 자신의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만 보고는 나무라는 사람도 있다. 삶의 모범은 보이지 못하면서 대접받으려고 하는 사람도 만난다. 그래서
예부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방귀뀐
놈이 성낸다.’라는 말이 생겨났나 보다.
다른 사람의 지극히 하찮은 잘못은 크게 보이지만 자신의 잘못은
작게 보이는 것은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번 말씀 드린 대로 하느님의 눈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6,42)는
주님의 말씀이 크게 들린다. 철저한 자기성찰만이 우리에게 이웃의 잘못 앞에서 자비롭고 인정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
“너나 잘해“라는 노래가 있다.
‘너나 잘해, 내
걱정 하지마!’‘너나 잘해, 잘난 체하지 마’ 하며 부르는 노래다. 그런데 자기의 삶이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남에게 강요하면 말하긴 불편해도 속으로는 “너나 잘해!”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삶이 풍요롭지 못할 때 하는 말이나 행동은 헛소리에 불과하고, 위선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으로 말해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 대신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 힘“이라 한다면
잔소리가 될까? 그러나 “자신이 아는 대로
살지 않는다면 아무리 많이 안다 한들 무슨 유익함“이 되겠는가? 머리에 있는 지식이 마음으로 내려오고, 손발에서
실천되어야 하는데, 분명 이것도 신앙의 십자가다.
우리는 매 미사 때 마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며 가슴을 친다. 이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가 내 탓을 찾으면 용서가 되고, 화해가 되며, 화목과 친교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달에 가서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보고 온 우주인처럼 나에게서
나오면 내가 보인다. 내가 얼마나 작고 좁고 곡 닫힌 자물쇠였는지, 그리고
세상이 얼마나 크고 장엄한지, 그리고 그만큼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인지, 우리가 왜 하느님의 희망인지가 보인다. 우주인이 지구를 떠나서 지구를
보았듯 산에서 나와야 산이 보이는 법이다. 같은 이치로 나에게서 나와야 내가 보이는 법이다.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