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6 주일 김두진(바오로)신부님 강론

행복과 불행선언

“인간만사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있다. 옛날 중국 북방의 요새(要塞)근처에 점을 잘 치는 한 노옹 (老翁)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
노옹의 말이 오랑캐 땅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애석한
기색 없이 태연하게 이렇게 말한다
.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그
말이 오랑캐의 준마를 데리고 돌아왔다
. 마을 사람들이 이를 치하하자 노옹은 조금도 기쁜 기색
없이 태연하게 말했다
. “누가 아오? 이
일이 화가 될는지
.” 그런데 어느 날, 말
타기를 좋아하는 노옹의 아들이 그 오랑캐의 준마를 타다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 마을
사람들이 이를 위로하자 노옹은 조금도 슬픈 기색 없이 또 태연하게 말했다
. “누가 아오? 이 일이 복이 될는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어느 날, 오랑캐가 대거 침입해 오자
마을 장정들은 이를 맞아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 그러나 노옹의 아들만은 절름발이였기 때문에
무사했다 한다
. 이처럼 새옹지마란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언제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너무 슬퍼하거나
또 마냥 기뻐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의미다
.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행복과 불행의 선언을 듣는다.

마태오 복음에는 진복 팔단이라 하여 여덟 개의 행복선언 이지만, 오늘 읽는 루가 복음에서는 네 가지 행복 선언이 들려지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이들과 불행한 사람 들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예수님 때문에 박해 받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라 하며 반대로 배부른 사람
, 웃는 사람, 좋은
말만 듣는 사람이 불행하다고 한다
.

 

우리가 생각하는 불행한 사람들이 행복한 이유는 이제 하느님께서
선정을 베푸실 때가 되었으니
, 비록 지금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되고 배부르게 되며 웃게 될 것이기 때문 이다. 결국 못난 자들이 비록 지금은 비참하지만, 오래지
않아 하느님의 나라가 오면 그 처지가 아주 달라지겠기에 그들을 복된 사람이 된다는 희망의 말씀이다
.

 

오늘 제 1 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율법을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살게 되는 상황이 대조적으로 비춰 진다
.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지만
, 사람
스스로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아 겨우 살아나갈 수 있을 정도의 활력 밖에는 없고
, 번영할 능력이 전혀 없다고 한다.

이런 표현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존경심과
같은 보편적인 종교적 감정이다
. 예레미야의 말에 따르면, 누구인가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단지 가난이나 굶주림이나 슬픔이 아니라 주님께 그의 신뢰를 맡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
반대로 자신의 힘과 사람에게 의지하여 저주받은 사람은 자신의 출세와 성공을 위해서 자신의 가치를 버리고 굴복하는 사람들이기에 불행하다고
한다
.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실제로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율법을 마음속에
간직하라고 한 화답송의 시편의 말씀과 같다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면
복된 사람이 될 것이지만
, 우리가 인간의 기준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불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현실의 잣대에 빠져 있다면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을 결코 쉽지 않다
. 평생 돈을 펑펑 써도 남아도는 부자들이 우리가 모방해야 할 상징으로
높이 추켜올려지고 있는 반면
, 곤궁한 사람들은 우리가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사람들로 멸시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 오늘 말씀하시는 행복의 길에서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그런 운명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라고 하신 것은 결코 아니다
.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흥청거리는
삶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 나 예수님의 관점에서 우리의 가치들을 평가해 보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

 

마태오 복음에서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라고
가르치고 있다
. 마음이 가난해서 늘 마음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이 바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
? 그래서 가진 것이 많아서 더 이상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불행한 사람들이
아닐까
?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늘 가난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변화란 영적인 변화 즉
, 회개를 말하고 있다. 회개는
고해 성사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변화를 말하기에 결국 행복한 삶을 지향하는 것이다
.

   

우리는 행복을 지향하며 산다. 그것이 옳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 부유하게 살고 싶고 배부르게 살고 싶고 웃으며 살고 싶은 사람들이 잘못
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부유하기 때문에 배부르기 때문에 지금 웃기 때문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 불행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 행복을 지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하느님의 법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행복이 무엇인지 먼저 물어야 하고, 참
행복을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인지도 함께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