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를 사랑하라!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친구들과 열심히 놀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고픔을 잊을 만큼 재미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친구들과 사족을 못쓰고 어울렸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 때 우리는 함께 하는 것을 배웠는지 모른다. 배고프고 힘
들어도, 크게 재미없어도 혼자 사는 세상은 더 재미없고 따분하다는 사실을 배우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라는 말씀을 황금률이라
한다. 하지만 팔이 안으로 굽듯 사람은 남 보다는 자기를 향한 마음이 크다. 그렇기에 누구나 이런 황금률 앞에서 한 번쯤 뒤로 물러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하면 나도 하지만, 나 혼자 굳이 남들이
내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하면 결국 나만 바보 되는 것 아닐까? 사실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으면 하느님 백성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구약의 아브라함도 모세도 신약의 마리아도 요셉도 없었을 것이니, 결국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달리 생각하셨다. 그분은 온전히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 백성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시고, 아무
조건이나 보장 없이 남이 해주기를 바라기 전에 해 주시며 사셨다. 이는 당신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분은 당신 사랑의 길을 묵묵히 가셨다. 그분이
그렇게 시작하셨기에,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생겼고, 우리
모두를 위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토대를 마련하셨다. 그분이
먼저 시작하셨고 늘 또다시 그분의 길을 따라 걷는 이들이 있었기에 하느님 백성이 존재하고 교회가 존재하고 공동체가 존재하게 되었다.
황금율과는 반대로 세상은 “남들이
내가 바라는 것을 하도록 하라“고 가르친다. 더
나은 사람은 목적지에 남보다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고, 유일하게 살아남는 방법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이라 가르치니 남보다는 먼저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이런 말들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옳은 방법이라 믿는 이들이 무척 많다는 사실이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다윗은 사울 왕의 통치에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사울 왕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하여 다윗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그 반대로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고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을 때, 그는 사울이
하느님이 선택한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사울을 살려줌으로 하느님 사람에 대한 존중과 용서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황금률은 그리스도 신앙인 모두를 바보 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께서 어떤 문맥으로 말씀을 하셨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교훈에 앞서 당시에
잘 알려져 있던 구약성경의 내용을 인용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마태 5:38.-
탈출기 21:24, 레위기 24,20 참조) 동태복수법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을 구실 삼아 많은 이들이 개인적인 분노를 표출하고 복수심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자신이 당한 것보다 더 혹독한
앙갚음으로 갚아주게 이른다. 이에 예수님은“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즉 나에게 잘못하는 이에게
맞서지 말라고 하심으로 동태복수법을 폐지하신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뺨을 맞은 사람에게 다른 뺨을 내어주라 (맞지 말고 맞아주라)고 말씀하시며 공격이나 모욕을 뛰어 넘어 누가 진정한 승리자인가를 말한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하심으로 (빼앗기지 말고 주라)하신다. 이들은 더 이상 폭력의 희생자가 아니고 자발적인 행동이었으니
보복도 필요 없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나는
힘에 의해 뺏기지 않고 스스로 훨씬 더 많이 줄 수 있는 용의가 있다”는 자세로 다윗이 사울 왕에게
했던 것처럼 악을 선으로 극복하게 된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의 독특한 신학적 접근방법으로, 흙으로
빚어진 아담과 하늘에서 온 그리스도 (마지막 아담)를 비교한다. 첫 사람 아담은 “자연적 생명체”였고
둘째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비록 첫 사람인 아담의 형상으로 태어났지만 세례를 받음으로써 둘째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니 사회가 만든 법칙에 따라 살려는 유혹에 살고 있지만 복음이 주는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 자신을 미워하는 이들을 선으로 대하는 것, 그리고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신 말씀에서 시작한다. 이런 자비 안에서 심판도, 단죄도, 용서도 가능해 지지 않겠는가?
세상을 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굳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꺼내 들지 않더라도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가 우리 인간들이다. 내 안으로 좁혀진 시각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시각으로 바뀌면, 사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거룩한 존재들이다. 하느님의 형상에 앙심을 품지 말고 자비심을 가지라는 부름을 받는다. 그것이 진정으로 영웅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영웅적인 삶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