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지난 주 독립기념일에 하이랜드팍 (Highland park)에서 퍼레이드 하는 시민들에게 총을 난사해 6명이 죽고 24명 이상이 총상을 입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이사고로 시티에서 주관하는 독립기념일 폭죽행사는 줄줄이 취소되었지만 개인적으로 폭죽을 터트리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전쟁이 나면 이정도 시끄러울까 할 정도로 폭음은 기뻐하는 나라의 경축일을 즐기는 것이 아니다 싶었다. 밤새 천둥과 번개도 하늘의 노하심을 보는 듯했다. 점점 잦아드는 총기 사고는 마음을 아프게 하고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 교사의 질문에서 자신의 삶 안에서 늘 마주치는 불확실성과, 결국은 죽음을 맞이하게 될 인간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을 본다. 인간은 이 두려움을 이겨 내려고 하느님을 만나려 하고, 만난 하느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고자 한다. 영원한 생명을 묻는 교사에게 예수님은 다시 물으신다.”율법에 무엇이라 쓰여 있느냐?””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하였습니다.”율법 교사의 대답에 “옳게 대답하였으니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신다.
율법학자가 묻는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지극히 자기중심적 질문이다. 왜냐하면 이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면서도 굳이 이웃의 정의를 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오늘 복음에는 사제, 레위인, 사마리안의 세 부류의 사람들이 나오지만, 진정 참 사람,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종교인이 아닌 사마리아 사람 하나였다. 과연 내가 이런 상황에 있다면 나는 그 세 명 중 누가 될까?
사실 얼마 전 아침에 일어나 밖을 보니 어느 노숙자가 성당 마당에서 이불을 깔고 잠을 자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경찰에 신고할까? 아니면 모른 척하면 잠을 자고 나서 그냥 가지 않을까? 안 가면 뭐라고 하면서 쫓아내지? 라는 생각에 미치자 잠잘 곳도 없는 이에게 야박하게 내쫓을 궁리만 하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부끄러웠다. 용기를 내어 깨워 여기서 잠을 자면 안 된다고 정중히 말씀 드리니 그 양반도 눈을 뜨고 일어나 몇 시냐고 묻고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짐을 챙기는 동안 기다렸다가 얼마 되지 않는 돈이지만, 가서 아침식사라도 하시라고 돈을 드리니 고마워하며 다시는 여기서 잠을 자지 않겠다고 약속하고는 떠났다. 그 잠깐의 순간이었지만, 그 때 나는 오늘 복음의 사제도 되었고, 레위인도 되었고, 창피하게도 사마리아사람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신비롭게도 예수님이 두 모습으로 계심을 보았다. 착한 사마리인을 통해 자비로운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고, 또 초주검이 된 사람을 통해 고난 받는 예수님이 보였다. 예수님도 “너희가 내 형제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 말씀 하시지 않으셨던가? 옛 교부들의 해석으로는 사마리아라는 단어는 히브리말로 목자를 뜻하므로 예수님은 구원을 필요로 하는 우리들의 상처를 싸매 주고, 치유할 수 있도록 교회라는 여관에 우리를 맡겼으며, 다시 돌아와 보살펴주겠다고 약속하고 떠나신 분이시라 한다. 그런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믿는 우리 모두가 누군가에게 착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이웃이 돼 주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오늘 독서로 들은 신명기의 말씀도 이런 의미에서 크게 다가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또 그것은 바다 건너편에 있지도 않다. 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일체의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라고 한다. 몰라서 실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한다고 한다. 바로 아주 가까이 우리 마음 안에 새겨져 있고 우리 입에 있기에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라고 분명히 못 박는다.
오늘 복음의 사제와 레위인은 영적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런 저런 계율이나 율법은 충실히 지켰을 지 몰라도 정작 하느님의 뜻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으로 차단된 시야였기에 제일 중요한 사랑이 빠져 있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의 영적 시야는 활짝 열려 있었기에 있는 그대로의 이웃의 현실을 보는 자비의 눈 덕분에 자비로움을 실천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실천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 안에서 한 가족이며 이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의 길에 이르는 길은 ‘연민의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되는 것이다. 가엾이 여기는 자비로운 연민의 마음은 값싼 동정이 아니라 함께 공감하고 동참하는 마음(Com-passion),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사람의 예를 드신 후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율법 교사에게 묻는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나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누가 내 이웃인가 ’라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허는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이다. 바로 이것 만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게 말씀하신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