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4일 연중 제 15 주일
하느님께서 후하신 것에 대해 시기하는 사람이 있을까?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보다 잘 되는 것을 배 아파하는 것이니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후한 것을 배 아파하는 것이 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후하실 때는 너무 감사할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후하신 것을 시기하는 것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후하게 하실 때라면,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 같은 마음일 것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불행에 기대어 행복해 한다.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전용차선을 달릴 때 신나 해 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며 안 됐다고 하면서도 나는 행복하다 느끼는 것이 다 이런 류의 행복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복은 나보다 못한 사람만 보면 행복하기에 올려다보면 쉽게 깨져 버리는 행복이다. 오죽하면 올려다보지 말고 내려다보며 살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셨을까? 그러나 내려다보며 살라는 말도 옳은 말은 아니다. 정확하게 올려다 보지도 말고 내려 보지도 말아야 한다. 상대적인 빈곤도 상대적인 풍요도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계산법이 우리의 계산법과 너무 달라서 우리는 때로 당황해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흔아홉 마리를 그대로 둔 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마태 18,12 참조) 그렇고, 세상을 사는 이치와 전혀 다른 말씀을 많이 하신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다. 주님의 포도밭에 아침부터 와서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일이 거의 끝날 무렵에 와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을 받는다. 마치 평생을 착하게 산 사람이나, 평생 강도 짓을 하다가 죽기 바로 전에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죽은 강도가 똑같은 대접을 받는 것과 같다. (루카 23,42 참조) 우리들도 오늘 복음의 등장하는 일꾼처럼
밭주인에게 불공평을 호소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 동조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일한 만큼 합당한 몫을 받는 것이 공평한 정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믿음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욕심과 공평을 착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착각과 우리의 논리를 넘어서는 섬세함으로 우리 생각의 허술함을 올바로 세워주신다. 오늘 복음의 가장 큰 메시지는 참된 공평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의나 공평에는 반드시 그 바탕에 마음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저 잣대나 저울질로 가릴 수 없는 것이 공평이고 정의이기 때문이다.
오늘 비유에 밭주인은 다섯 시쯤 에도 일꾼들을 찾아 나선다.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을 봐야 한다. 첫째, 밭주인이 장터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이들에게 물어본다.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그러자 그들은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을 한다. 진정 공평한 사회라면 그늘진 곳에 있는 사람들도 공평함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 하지만, 다양한 사연으로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을 기껏해야 동정 어린 시선으로, 아니면 멸시와 거부감을 보이는 것이 우리의 세상이다.
하느님은 그렇게 보지 않으신다.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지 못한 이유를 먼저 이해하고자 하신다. 사람마다 환경적 배경, 개인적 능력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차이를 가지고 같은 조건에서 살아남는 것은 능력이 있는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런 불공평한 구조 안에서 공평을 이야기 하는 모순을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세상일지 모른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그럴만한 사연과 사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유리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 때문에 자신들의 자리를 빼앗겼을 수도 있다는 것이 이해된다면 이른바 배려와 나눔이라는 마음이 허락되기 때문이다. 공평이나 정의는 자신의 이기심을 채울 때 사용하는 단어들이 아님을 꼭 기억해야 한다.
둘째, 밭주인은 사실 일꾼이 필요 없었다. 충분히 일꾼들이 일을 하고 있었고 날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해가 지기까지 일자리가 없어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다시 찾아 나선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올바른 길로 이끄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보여주신다. 세상의 죄로 인해 어디선가 헤매고 있을 양들을 찾아 나서시는 목자의 마음이다. 우리가 진정 공평하고 정의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면, 어느 누구도 대상에서 소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공평이나 정의라는 말은 그래서 결코 이기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단어다.
어쩌면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은 억울한 감정을 만들어내기에 아침 일찍부터 일을 했던 사람들의 불평은 쏟아진다. 하지만 이들의 억울함은 사실 자신들의 욕심을 드러내고 있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욕심을 공평이나 정의라는 말로 둔갑시킬 수 있다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늘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배우게 된다. 첫째로는 하느님 나라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았으며,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꼴찌로 초대받은 세리와 창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처사에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의 심기가 불편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산법 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품삯의 양은 같지만 그 질은 다르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의 한 데나리온 속에는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정성이 배어 있지만, 늦게 왔는데도 같이 주어진 품삯의 가치는 그들에게는 정성과 땀이 없기에 처음 것과 다르다는 뜻이다. 이는 질보다 양을 더 좋아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의 교훈이 된다.
같은 양이라 할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내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하느님의 후한 사랑을 불평하기 보다 지금 우리가 행해지는 공정과 정의가 어떤 것인지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오늘 세계 이민자의 날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어려웠었던 과거를 기억하며 지금 힘들어 하고 있는 새로운 이민자 우리의 이웃에게 어떤 사랑을 전해야 할지도 함께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