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성모의 성월이요, 제일 좋은 시절의 첫 금요일, 사고 이후 처음으로 봉성체를 다녀왔습니다. 다리가 아프지만 저보다 더 아프신 분들을 찾아 생명의 빵을 나누는 것은 더 큰 기쁨일 수 있기에 조금 무리를 해서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양노원이나 시설을 들어가려면 많은 문을 거쳐야 합니다. ID검사를 하기도 하고, 어디를 언제 또 얼마나 있다가 나오는지도 세세히 적어야 합니다. 안전을 우선으로 하는 곳은 매우 까다로운 심사가 문 앞에서 이루어지기에 어느 곳은 문을 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요한 10,10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드나드는 양의 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을 드나들며 살기 위해선 먼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10,27ㄱ) 지금 한국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후보들의 공약과 비난이 난무합니다. 한자리를 놓고 다투는 선거인지라 자기를 한껏 치켜세우며 서로를 비방하고 자기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이라며 큰소리로 지지자들에게 호소합니다. 참으로 시끄러운 세상입니다. 목소리가 큰 내가 쉽게 할 수 있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세상처럼, 서로 목청을 돋웁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의 과거에 큰 소리에 걸맞게 책임을 지는 지도자들이 많지 않아서인지 희망은 절망으로 바뀌곤 했습니다. 이 시끄럽고 복잡한 세상 안에서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할까요?

 

향심기도의 선구자 토마스 키팅 신부는 “하느님의 언어는 침묵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주님을 만날 때 주님은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고, 지진 가운데도 계시지 않았으며, 지진이 일어난 뒤의 불속에도 계시지 않았고, 불이 지나간 뒤에야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안에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는 싶어 하지만, 그 목소리가 침묵이라니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소리는 귀로만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알아들으라.”는 주님의 말씀은 마음으로 알아들어야 함을 뜻합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요한이 예수님의 가슴에 귀를 대고 마음의 소리를 듣듯이, 침묵의 언어를 알아듣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묵시 3,20)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10,28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알량한 지식으로 세상의 이치를 모두 아는 듯 사는 우리의 교만을 지적하는 말씀이 아닐까요? 마치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9,41)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나는 나를 얼마나 압니까? 사실 나를 알면 내 안에 계시는 주님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누구인지도 잘 모름에도 나의 의지를 따른다는 것은 어쩌면 어리석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를 속속들이 아시는 주님을 따르는 것은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토록 멸망하지 않을 것이고, 또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10,28)

 

 

오늘은 부활 후 제4주일이며 1964년부터 제정되어 기념하는 ‘성소주일’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과 나와의 개인적이고 인격적 관계입니다. 교회는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지만 그 부르심은 개별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갑니다. 성서에서도 보면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아브라함이란 이름을 주시고, 이사악을 바치라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 여기 있습니다.” 하며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복을 받습니다. 하느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시며 그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함으로써 사무엘과 하느님과 관계도 시작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베드로’란 이름을 지어주시며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셨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바오로에게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부르셨고 그에게 이방인 선교의 큰 소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또 무덤 앞에서 울고 있는 마리아의 이름도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성서에서 하느님이 이토록 이름을 부르신 것처럼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십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이라 명명된 김춘수님의 시를 이렇게 고쳐 읊어봅니다. ‘주님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기 전에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분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자 나는 비로소 그분께로 가서 그분의 꽃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려면 먼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들은 안전을 위해 또 안락함을 위해 집을 짓고 문을 만듭니다. 우리 마음의 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안전과 안락함을 위해 굳게 닫아놓은 문을 열어야 합니다. 내 것만 찾고 내 목소리만 내고자 하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없습니다.

 

시카고 순교자 성당이 세워진지도 50년이 가깝습니다. 50여년의 역사 안에서 안타깝게도 성직자나 수도자가 배출되지 못했습니다. 성소후원회도 발족하고 기도와 봉사를 통해 성소자들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미약하지만 교회에 봉사할 젊은이들이 늘어날 것을 희망합니다. 오늘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봉헌하면서 사는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그 길을 준비하는 신학생들과 성소에 응답한 사람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실낱같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해도 그분의 부르심을 듣고 응답하는 이들이 늘어나기를 함께 기도하는 날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의 이름을 차례로 불러주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라도, 양들의 문을 드나들며 싱그러운 풀밭을 찾아 얻기 위해서라도,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기 위해서라도, 낮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아닌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어야 합니다.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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