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4일 대림 제 4 주일 과 성탄 전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당찬 응답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수락하는 것은 신앙인이 지녀야 하는 믿음이다. 가나 혼인잔치에서 종들에게 그분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한 결과, 물이 술이 되는 기적이 벌어졌다.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가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치니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또한 물 위를 걸어오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되었듯이 하느님의 큰일을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명령하는 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의 바탕에서 비롯된다. 해서 놀라운 일,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일, 기뻐할 일은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진다.
뭐든지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신비로운 세계에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불 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것까지도 품어 안는 그곳에 믿음의 세계가 열리고 하느님이 개입하실 수 있는 틈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앙 안에서의 큰일은 우리 일상의 논리를 넘어 하느님 말씀 안에 담긴 뜻을 알아듣고 행하는 믿음이 이루어 내는 것이다. 토마스는 합리적인 생각으로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보고 이치에 맞는지 확인하지 않고는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지 못하겠다고 했지만, 주님은 못으로 뚫린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며 그의 닫힌 눈과 마음을 열어 믿게 하셨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열려 있는 사람들이고 그런 이들은 하찮은 사람들로 보일 수 있다. 자기 힘보다는 하느님의 힘을 믿고 있으니 이치에도 안 맞고 힘도 없어 보일 수 있기에 그렇다. 그래서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하찮은 사람이 되려는 것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하느님이 우리의 전부가 되려면 나는 하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커다란 일들을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올 해의 대림절은 한 주가 빠진 듯하다. 대림 4 주일인 오늘 우리는 성탄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시간에 쫓겨 신자 분들에게 성탄 카드도 보내지 못했다. 죄송하게 생각하며 이 자리를 빌려 성탄 인사를 드린다.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 성당의 구유는 올해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되고 치장되었지만, 예수님이 누우셨던 구유는 저렇게 예쁜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짐승들이 울음소리 때문에 시끄럽고, 짐승들의 분비물로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외양간이고 그 안에 자리 잡은 곳이 구유다.
만물의 왕이신 그분께서 그 구유에 누워 세상에 오셨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구유에 누으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는 일이다. 당대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들은 끝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들은 소위 잘난 사람들이었으며, 시끄럽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으며 하느님도 잘 믿고, 율법도 많이 알아 주님이 오시면 당당하게 얼굴을 마주하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지식과 특권의식이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해 낮게 누으신 그분을 보지 못하게 했다. 헤로데 왕은 권력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어 다른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고, 입으로는 나중에 라도 가서 경배하겠 노라 했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아기를 죽여 버렸다. 누구든지 나보다 더 낫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높으신 분들은 그래서 낮게 구유에 누으신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한다. 학식, 재산, 칭찬 이런 화려함에 속아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 안에서는 구유에 누으신 그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높은 데가 아니고 낮고, 더럽고, 냄새 나고, 시끄러운 마구간에 누워 계신다. 우리가 이미 와 계신 분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구유에 누으신 그분을 경배하러 낮고, 냄새 나고, 더러운 마구간으로 향해야 한다. 우리 이웃 중에 참으로 냄새 나고, 더럽고, 시끄러운 마음을 가진 이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이들,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울부짖는 이들,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할 이들 그래서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행복할 수 있도록 그분의 고요함을 향해 발길을 돌려야 한다. 우리를 위해 강생하신 예수 안에서 과거의 생활, 관계, 소유 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과 얽힌 모든 삶은 다 버려져야 한다. 대신 새로워지려는 마음, 새로워지겠다는 삶의 의지로 예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등 돌렸던 우리의 삶을 전환해야 한다.
지난주일 대림 특강 때 보았던 폭격 맞은 폐허의 시멘트 덩어리 속에 누으신 아기 예수님이 계속 생각난다. 올해 성탄절은 예수님을 비루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게 만든 옛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으면 하지만, 이미 전쟁으로, 아니 우리 욕심으로 얼룩진 세상에 오시니 이 천년의 마구간 보다 더 형편없고 더 냄새 나고 더 시끄러운 구유가 차려진 듯하다. 우리가 진심으로 성탄을 축하해야 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렇게 더 형편없어지고 더 냄새나는 곳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님 때문이다. 그래도 먼 길을 찾아 믿음의 황금과 기도의 유향 그리고 희생의 몰약을 예물로 드리며 경배한 동방박사의 모습으로, 일상의 하던 일을 멈추고 서둘러 예수의 탄생을 알리던 목자의 모습으로 아기 예수를 맞이하고 이 소식을 널리 알리는 새사람이기를 청해본다.
우리의 더러움과 시끄러움 때문에 또 오셔야 하는 그리스도께 경배 드리는 우리였으면 한다. 모두에게 다시 성탄의 인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