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 연중 제 34 주일 그리스도 왕 대 축일
어떤 사람이 아주 오래된 만년필을 하나 가지고 있다. 더 이상 사용할 수도 없을 것 같은 낡고 고장 난 만년필을 왜 가지고 있는지 의아해 하고 있는데, 그 만년필이 아브라함 링컨이 사용하던 것이라면 버리지 못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해서 어떤 물건이든지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천정부지로 달라진다. 그러다가 문득 든 생각이 그리스도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고자 하신다는 생각이 들자 우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에 감사와 감격이 밀려왔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양 떼를 찾아 보살펴 주시리라고 약속하신다. (에제 34,11) 당신은 유배로 인해 흩어져 있던 당신의 양 떼 이스라엘을 구해 내고 보살피실 것이다. 당신 몸소 그들을 먹이고, 그들을 누워 쉬게 하실 것이다. 오늘 화답송에서 노래하는 시편 23장 말씀 그대로“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네.”이다. 주님께서는 착한 목자이시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아내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며, 부러진 양은 싸매 주고, 아픈 것은 원기를 북돋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좋은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기름지고 힘센 양은 없애 버리겠다.”(에제 34,16)고도 말씀하신다. 양 떼에 속해 있다고 해서 다 같은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들 가운데는 다른 양들이 먹어야 할 것을 대신 빼앗아 먹고, 약한 양들을 밀쳐대는 힘센 양, 곧 거들먹거리며 교만을 떠는 나쁜 양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백성들을 유배라는 힘든 상황에 빠트렸던 임금과 그의 신하들, 높은 지위를 누리던 유다의 지도자들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여기에 덧붙여 “양과 양 사이,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에제 34,17)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양과 염소를 함께 기르곤 했는데, 우리의 예상과 달리 양들은 순하기는 하지만 게을러서 움직이기조차 싫어하는 짐승이다. 그래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염소가 없으면 병에 걸리기도 쉽고, 길을 찾아 나서기도 어렵다. 반면 염소들은 겉으로 보기에 양들을 못살게 구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게으른 양들이 움직이게 만들어 어려운 길이나 위험에서 양들이 벗어나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을 했다. 그래서 예레 50,8은 이렇게 말한다. “바빌론 한가운데에서 칼데아인들의 땅에서 도망하여라. 거기에서 빠져나와 양 떼 앞에서 걷는 숫염소들처럼 앞장을 서라.”
이렇게 보니 숫양과 숫염소 사이의 시비를 가리겠다는 하느님 말씀은 마치 다른 양들의 것을 빼앗아 먹은 뒤 누워서 살만 찐 못된 숫양과 양들을 이끌고 가며 삶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숫염소 사이에 시비를 가려주겠다는 말씀으로 들린다.
염소의 이미지가 다소 부정적이게 된 데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비유 말씀의 영향이 크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양들을 오른쪽에, 염소들을 왼쪽에 세울 것이라고 말씀하신 뒤 오른쪽 사람들에게는 구원을, 왼쪽 사람들에게는 파멸을 줄 것이라는 이 말씀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염소가 양보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종말이 되면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가 분명히 드러나고 갈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다. 실제로 목자는 양과 염소를 우리에 넣을 때 추위를 타는 염소는 우리 안쪽에, 더위를 많이 타는 양은 우리 바깥쪽에 따로 구분해서 재우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둘로 가르는 행위 자체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야 말로 참된 임금이심을 고백하는 오늘 그분께서는 종말의 날에 모든 이들의 재판관으로 우리의 행실에 따라 심판하실 것을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분의 재판 기준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목마르며, 헐벗고 병든 이들을 어떻게 대하였느냐에 따를 것이다. 그들을 주님을 대하듯 대한 이들은 구원을 받게 될 것이고 그들에게 아무것도 베풀지 않은 이들은 파멸에 이를 것이다. 그날이 오면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갈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걱정을 주는 말씀이나 경고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 모든 이들의 왕 예수님의 오른 쪽에 영광스럽게 서게 될 사람들은 대단히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주변의 작은 이들을 만난 사람들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옷장을 열어보면 일 년에 단 한 번도 입어보지 않는 쌩쌩한 옷들로 꽉 차 있는데, 과감하게 정리해서 꼭 필요한 곳에 보내는 사람, 하루 종일 찾아오는 이 하나 없어 무료하게 천장만 바라보거나 보지도 않는 TV를 크게 틀어 놓고 있는 양로원에 있는 이웃을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 추운데 먹을 것 없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샌드위치 만들고, 따뜻한 커피 끓이며 대접하는 사람들 이 모두 당당하게 예수님 오른 편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날에 가서는 우리가 그간 이웃들에게 행한 사랑의 봉사는 모두 인류의 맏형이신 예수 그리스도, 결국 하느님을 위한 봉사로 변환 될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공경하려면 다른 방법이 없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환대하고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며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거부는 하느님에 대한 거부가 된다. 인간과의 단절은 하느님과의 단절이다.
그리스도 왕 대 축일로 전례력 마지막 주간을 지내고 있는 오늘 하느님 나라에서 나는 왼쪽에 설까 아니면 오른쪽에 설까를 생각해 보며 지금을 충실히 살도록 하자. 우리는 아브라함 링컨이 쓰던 만년필 보다 훨씬 귀중한 온누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 왕께서 쓰시려는 사람들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