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연중 제24 주일
하늘을 쳐다보시는가? 9월의 하늘은 마치 누군가 파란 물감을 쏟아 부은 듯 청량하고 맑다. 보고만 있어도 하늘의 이야기가 쏟아 내릴 것 같다. 그런데 하늘은 늘 있는 곳에 있으니 우리의 눈은 스마트폰에 고정되어 있고, 머릿속은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일상 문제와 스트레스로 복잡하다. “통장 잔고는 왜 이렇게 바닥을 길까?” 혹은 “아까 그 사람은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했을까?” 하면서 땅만 바라보고 살아간다.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미워하는 이에게 복을 빌어주라”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귀로 들어 머리로는 알겠는데 가슴으로는 절대 안 되는 안타까움이 넘친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면 우리는 감정은 스스로 문을 닫아 버린다. 미움과 증오라는 감정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매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며 억울해한다.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은 온데간데없어지고, 그저 상처받은 피해자 프레임에 갇혀 “내 팔자야” 하고 자포자기하며 살아간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복음은 비유 하나를 들려준다.
복음에 나오는 종의 빚은 자그마치 ‘만 탈렌트’였다. 요즘 가치로 환산하면 수조 원, 아니 개인이 평생은커녕 수 없이 다시 태어나도 못 갚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다. 종이 엎드려 시간을 좀 주시면 다 갚겠다고 빌자, 원금 분할 상환 기한 연장이나 담보 설정 같은 조건을 붙일 만한데, 주인은 탕감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베푼다. 이유는 단 하나, “가엾은 마음”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도무지 이해 안 되는 ‘초대형 적자 경영’마인드다. 하느님의 자비는 이렇게 파격적이고 헤프다 싶을 정도의 상상초월의 사랑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수조 원의 빚을 단번에 탕감 받고 나온 그 종이 나가자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난다. 그리고는 멱살을 부여잡고 당장 돈 갚으라며 감옥에 가둬버린다. 얼마나 기가 막히는 처사인가? 그런데 정작 우리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 싶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 구원, 조건 없는 자비’라는 엄청난 것들을 은총(공짜)으로 받아 산다. 그런데 누군가 나에게 말 한마디 섭섭하게 하거나, 손해를 입히면 멱살부터 잡으려 든다. 하느님께 받은 거대한 용서의 은혜는 잊어버리고, 타인의 조그만 허물에는 눈을 번뜩이며 법적 감정적 응징을 가하려 한다.
오늘 1독서 집회서 저자는 우리게 엄청난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 (집회서 28,3) 나에게 상처 준 사람에게는 칼같이 잣대를 들이 대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주님, 제 허물을 용서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참 눈치 없고 염치없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분노와 진노 혐오스러운 적개심을 쥐고 있으면서 하느님의 평화를 바라는 것은 자체가 망상이라는 것이다.
용서에는 아주 특별한 ‘자기 증식의 DNA’가 들어 있다. 하느님께서 우리게 베푸신 용서는 내 안에 쌓아두는 저장용이 아니라, 나를 거쳐 타인에게로 흘러가는 통로용이다. 하느님의 자비가 나를 지나 내게 상처 준 이들에게까지 흘러갈 때, 비로소 ‘화해와 자유’라는 용서의 진정한 완성이 이루어진다.
내가 아직도 누군가를 용서하고 있다면, 어쩌면 나는 하느님의 탕감 은혜를 아직 가슴 깊이 체험하지 못했거나 그 가치를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간관계의 온갖 갈등을 한 방에 해결할 열쇠를 우리게 건넨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 14,8) 내 체면, 내 자존심, 내 명예, 내 재산… 이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딱지를 붙여놓으니 조그만 손해나 상처에도 자빠지고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명예도, 내 억울함도, 심지어 내 존재 자체도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내가 왜 내 자존심 때문에 영혼을 상하게 하면서 분노할까?”하며 한 걸음 물러 나 의연해질 수 있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분노, 억울함, 적개심은 살다 보면 찾아올 수 있다. 그 감정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불청객에게 상을 차려주고 안방을 내어줄 필요는 없다.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때, 시선을 잠시 땅에서 하늘로 돌려보자. 그리고 나를 살려낸 자비와 은혜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내 마음을 정화하고, 그 독한 감정들을 보내야 한다. 여전히 이를 악물고 밤잠을 설치고 있다면 마음의 문밖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서성이고 계시는 예수님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제 그만 그 고통의 감옥에서 나오너라. 문을 열어다오.” 그렇다 용서는 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영적인 공식은 아주 단순하다. “주님의 것인 ‘나’가, 주님의 것인 ‘너’를 용서한다.” 또 “주님의 것인 ‘너’가, 주님의 것인 ‘나’를 해방시킨다.” 그래서 잃은 것도, 당한 것도, 빼앗긴 것도 ‘주님의 것’으로 보면 한결 가벼워질 수 있다.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서 하느님의 자비를 맘껏 받아들여, 나를 묶고 있던 미움의 줄을 툭 끊어 내는 우리였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