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서 아침을 먹어라.
LA의 피정집 수도원 아래에 조그맣게 지은 은둔자의 집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3년을 살았었습니다. 개인 피정자를 위한 집이였는데
수도원보다 더 좋을 것 같아 그곳에서 혼자 밥해 먹고 기도하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루는 전날 저녁 구워 놓은 생선이 있어 아침에
누룽지를 끓여 덥혀 먹으려 하는데 기도를 마치고 산책하시던 신부님이 잠깐 들리셨습니다. 아침 식사로 구운 생선을 먹느냐고 하시며
생선을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라 하셨습니다. 허긴 미국에서는 아침부터 구운 생선을 먹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빙그레 웃으
며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아침 일찍 생선을 구워주지 않았냐고, 해서 예수님께서 내게 아침 일찍 구운 생선을 주셔서
먹고 있다고……..
오늘 복음에서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시며 초대하시는 부활의 예수님을 만납니다. 빵과 고기는 그 분께서 전에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에서와 같은 빵과 고기 입니다. (요한 6,9-11 참조) 놀랍게도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와 오늘 베드로에게 나타나신 사화의 이야
기에는 같은 점이 많습니다. 첫 번째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는데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너무 잘 알고 있는 이유로 별로 놀라지 않습니
다. 예수님이 빵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면, 또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우리게 따뜻한 아침상을 차려
주신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영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우리가 부활사건과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에 놀랄 수 없다면, 어쩌
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이 가르치는 것은 신비의 두 가지 측면, 즉, 부활하신 주님의 놀라우신 기적과 그로 인해 우리가 살아야 할 변화된 삶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제 2독서에서 요한은 "권능과 부, 지혜와 힘, 명예와 영광과 축복"을 받은 어린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양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자신을 들어 내 보이신 똑 같은 양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셨지만, 지금 그분께서 다시 살아나시
어 그들에게 아침식사를 준비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 중 누구도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을" (요한 21,12)정도로 확실히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왜 부활하신 후 바로 하느님께로 돌아가시
지 않고 제자들을 다시 만나고 계신 것일까요?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실 일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라워하는 제자들을 먼저 먹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
보시오…….내 양들을 돌보아라." 성서 구절에서는 이 임무가 베드로에게만 주어지지만, 사실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같이 하시는 말씀입
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 지도자로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혼자만이 그 일을 떠맡
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당의 예를 들어보면 본당신부 혼자 사목을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
닙니다. 수녀님들, 사목위원들, 교육, 전례 또는 그 외 다른 교회 봉사직을 맡은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배고파하는 군중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을 도와 배불리게 하는 사도들처럼 말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영도자와 구원자로 삼아 당신의 오른쪽에 들어 올리시어,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게 하셨습니
다.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대담한 선포를 통해 세상에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부활의 예수님을 증거합니
다. 그렇습니다! 세례로 다시 난 그리스도인 모두는 어떤 방법으로든지 세상에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는 형식을 통해 이웃에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만약 부
활하신 주님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더 이상 놀라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면, 부활이 우리 삶에 가지는 숨은 뜻도 우리에겐 큰 의미가 없
을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부활을 보지 않고서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입으로의 하는 고백 뿐 아니라 우
리의 삶으로 믿음을 증거 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의도적이던 아니던 우리의 삶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외친 소
리와 똑같이 예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런 외침은 우리의 가족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심지어는 길
에서 만나는 낮선 사람들에게까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하시기에 앞서 얼마나 많은 빵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 (과연 너희들이 이 사람들을 다 먹일 수 있겠느냐는 질
문)에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
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마치 우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한 예를 들지요. 길거리를 가는데 어
느 사람이 구걸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 내가 돈을 주면 밥을 사 먹을까 아니면 술을 사 먹을까? 혹시 그 돈으로 마약을 하는 것은 아
닐까? 저 사람이 술이나 마약을 사면 저 사람을 돕는 일이 될까? 혹은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왜 저 사람은 사지가 멀쩡한데
일은 안하고 구걸을 하는 것일까?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데 내가 한 사람에게 베푸는 작은 선행이 과연 '무슨 소용이
란 말일까?' 혹은 일 년에 한번 부모님께 전화 드리는 것이 과연 효도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가족들 안에서도 우리 애들 혹은 아내(남
편)에게 이렇게 표현 하는 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사실 소용이 있고 없고는 우리가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 필
요한 이웃에게 할 수 있는 조그만 일 조차 거부하며 과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며 안드레아의 푸념 섞인 말만 되풀이 하
는 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와서 아침을 먹어라" 예수님은 방금 잡은 물고기를 굽고, 보리 빵을 주시며 우리를 먼저 배불리 먹이십니다. 성찬의 기쁨이 바로 그것입
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하십니다. 빵으로 영적인 음식을 먹었으니, 가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신앙이라 삶으로 외쳐야 합니다. 바로 이런 증거의 삶을 통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고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거룩한 미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 Fr. 김 두진(바오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