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연중 제 21 주일 복음 묵상
오래 전 운 좋게 비행기 조정석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이야 자동으로 비행하는 기술이 생겼다고 하지만, 그 때만 해도 반자동으로 조정을 해야 했는데 조정석에는 핸들과 십자가 같은 나침반이 있었고, 핸들을 그 십자가 가운데를 맞추어 놓아야 비행기가 제 항로를 따라 날아 갈 수 있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뒤틀리면 가까운 거리야 상관없지만, 장거리 비행에서는 크게 항로를 이탈 한다고 한다. 그때 든 생각이 옳은 것은 옳은 것이고 그른 것은 그른 것이지 적당히 옳고 적당히 그른 것이란 없다는 것이다. 애초에 털끝의 차이라 해도 차이는 차이이며 나중에 극복할 수 없는 간격도 거기서 시작된다. 그러니 결국 첫발을 어떻게 떼느냐는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시도하던 자들이 집주인에게 했던 말이다. 언뜻 보면 이들은 항상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던 사람들처럼 보인다. 외견상 주님과의 거리가 매우 가까워 잘 지내는 듯 보이지만 어딘가 서먹함과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다음 구절에서 주인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그들이 아무리 부족하다고 해도 함께 있었던 사람들에게 하는 심한 말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들의 어정쩡하고 방관자적인 삶은 시작부터 이러한 결과를 이미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주인과 함께 있기는 했지만 한 번도 주인의 삶에 깊이 동참하지 않았던 자들이다. 주님의 기쁨과 슬픔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기만 했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비난 받지 않을 정도로만 살았던 사람들. 처음의 미온적 태도가 비록 작은 것이었다 하더라도 끝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주님, 구원 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하고 묻는 유다인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는 선민의식에 젖어 있던 사람인 듯하다. 그들에게 구원이란 이스라엘 사람인가 아닌 가에 있다. 구약의 후계자라 자처한 바리사이들이 그토록 율법을 강조한 것도 같은 이유다. 자신의 인생을 진심으로 책임지고 한발, 한발 성실하게 걸어가는 것을 생략하고 글자와 이념에 숨어 사는 삶이다. 선민의식의 우월감으로 좁은 문에 서 있던 자들은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좁았던 문이 어느새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는 큰 문으로 변하는 장면을 오늘 복음에서 만난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란 선민의식에 사로 잡혔던 유대인으로부터 배척된 이른바 이방인들이다.
그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기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자신들의 출신 성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잔치에 초대됐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 초대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에는 특정한 자격 요건이 필요하지 않은 듯하다.
제1독서에서 “나는 모든 민족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모으러 오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보리라” (이사 66,18)라고 한 주님의 말씀처럼 모든 이에게 하늘나라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그런데도 자신들만 초대되었다고 여기던 뒤틀어진 사고는 엄청난 차이로 그분과 멀어져 여러가지 규정과 법률이 좁은 문을 만들었고 잔치 초대에 응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다. 모든 이에게 열려 있던 문을 좁은 문으로 만든 이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늘나라의 문이 좁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좁은 문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경고가 아닐까 싶다. 하느님의 백성 혹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말씀도 듣지 않고, 듣지 않으니 실행은 더 어렵기에, 점점 멀어지는 하느님이 이제는 보이지도 않으니 스스로 좁은 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느님 나라에 초대된 수많은 이방인들의 널찍한 문과 어렵게만 보이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란 우리에게 결코 쉽게 보이지 않는다. 사실 구원의 길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넓은 길이고, 하늘의 법이 가까이 우리 마음 우리 손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면 좁은 문은 이미 넓혀져 있지 않을까 싶다.
좁은 문은 무작정 어려운 문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다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이런 상식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이, 상식을 지키는 이방인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된다고 오늘 복음은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대로만 실천해도 되는 이 길이 언제부터 가기 싫어하는 고지식한 길, 나만 손해 보는 느낌이 드는 진짜 좁은 문으로 변해진 것은 아닐런지… 해서 원래 큰 대문처럼 드나들기 쉬웠던 이 길은 나만 찾는 이기심으로 인해 좁디 좁은 문으로 변해 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 보라,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마시며 그분을 잘 안다고 자랑해도, 그저 나만 고집하는 아집에 사로잡혀 이웃을 아랑곳하지 않는 욕심 가득한 뚱보가 되면 문은 점점 좁아질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만으로 그 문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작은 차이가 천 리나 되는 거리를 만드는 것이라면 그 거리를 좁히는 것도 작은 변화에서 시작될 수 있다. 바로 회개를 통해 용서의 은총이 작은 변화이며 우리에게 허락된 넓은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