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연중 제 20 주일
우리말로 개 같다는 말은 매우 불쾌한 욕이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앞에 '개' 소리가 들어가면 모두 욕처럼 들린다. '강아지'라 한들 그리 썩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개 같은 여인의 울부짖음이 예수님의 사랑을 얻어낸다.
오늘 말씀의 전례는 우리의 구원이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달려 있음을 말한다. 아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지만, 구원은 하느님에 의해 모두에게 열려 있음을 말하고 있다. 1독서인 이사야서에서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나는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고,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리리라.”(이사 56,6-7)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자비와 구원이 불순종한 유대인들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내려지고, 마침내 모든 백성에게 미치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여러분도 전에는 하느님께 순종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불순종 때문에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었습니다.”(로마 11,30-32)
복음 역시 이방인에게 베풀어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가나안 여인의 믿음을 통하여, 당신을 그리스도로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누구나 하느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신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나안 여인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큰 소리로 계속 간청한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마태 15,22)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요,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며 이방인이면서도 주님을 메시아로 고백하지만, 정작 주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23) 그러나 예수님의 침묵은 그녀가 시험 안에서도 견뎌내는 신앙을 갖게 되기를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항구한 갈망을 지니기를, 침묵의 응답 앞에서도 울면서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듯하다. 결국 제자들도 여인의 외침을 마땅하게 생각치 않고, “저 여자를 돌려보내십시오. 우리 뒤에서 소리 지르고 있습니다.”(23)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하신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파견되었을 뿐이다.”(24)라고 하신다. 구약에서는 자주 이스라엘 백성을 양이라고 지칭했다. 예수님은 길 잃은 양처럼 헤매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돌보시고자 파견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열두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10,5-6)고 명하신 바 있다.
사실 초대교회는 많은 갈등 끝에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다. (사도 10장 참조). 그러나 이 여인은 그런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주님, 저를 도와주십시오.”(25) 염치도 없이, 그리고 체면이나 창피는 뒤로한 채 주변의 무관심과 박대를 견디어 내며 간절하고 절박하게 외친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자비로운 모습이라 기보다는 무심하고 비정하리 만치 간결하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26) 즉 이스라엘 사람은 자녀이고 이방인은 개라는 말씀이다. 누가 들어도 좋은 소리는 아니다. 여인과 그 지역 사람들이 들으면 발끈할 정도로 화가 날 표현이지만, 여인의 대답은 슬기를 넘어 간곡한 청으로 바뀐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7)가나안 여인은 지혜로웠다. 그녀를 강아지에 빗대었는데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특권을 인정하고 자신의 처지를 수긍한다. 해서 내겐 먹다 남은 부스러기라도 충분하다고 말씀드린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기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자신의 바람을 거리낌 없이 간구한다. 여인은 자신의 신앙을 훌륭히 입증해 보인 것이며 그의 신념이 예수님을 설득시켰다. 그녀의 슬기로 자녀들의 빵이 모든 이(이방인들)의 양식이 된다.
“아,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28) 예수님은 진정한 개종자의 믿음을 칭찬하신다.
정결법 운운하며 옛 사람의 전통에 매여 있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하느님의 백성보다 훨씬 더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는 여인의 믿음에 감탄하셨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28)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들과는 갈등을 겪으셨지만 이방인의 땅에서는 뜻밖에도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을 만나신다.
가나안 여인은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루가 18,13)라고 기도하는 세리처럼, 겸손으로 자비를 청했다. 또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고 고백하는 백인대장처럼, 믿음으로 자비를 청했다. 그리고 불의한 재판관에게 끈질기게 청했던 과부(루가 18,1-8)처럼, 하느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밤새도록 씨름했던 야곱(창세 32,25-27)처럼, 끈질긴 믿음의 인내로 자비를 청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단지 열매 없는 시련과 인내를 강요하시는 잔인한 시험관이 아닌, 온전한 구원과 은총을 주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드러내신다. 이로써 우리 모두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사랑의 계획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라 자처하는 우리에게 개(?) 같은 여인의 인내와 지혜 그리고 믿음을 가지라 독촉한다. 강아지 같은 믿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한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