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7일 주님 공현 대 축일
‘별들이 쏟아지는 해변으로 가요’라고 흥얼거리던 노래가 있었다. 별들이 해변에만 쏟아지는 것은 아닌데 왜 이런 노랫말이 우리들을 이해시키고 흥겹게 할까? ‘별이 유난히 별이 밝다’라고 말할 때, 별은 하늘 어느 곳이든 있지만, 유난하게 밝은 별은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닷가나 산속 에서다. 어두운 곳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그야말로 별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던가? 도심에서 올려다보는 하늘과 바닷가에서 올려다 보는 하늘은 왜 차이가 나는 걸까? 시골의 하늘은 도심의 하늘보다 별들의 수효가 더 많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도심이건 시골이건 별의 숫자와 밝기는 같지만, 도심의 밤은 전깃불로 밝혀져 있는 화려한 밤이기에 별들이 작고, 또 적게 보인다. 하지만 바닷가나 산 속의 밤은 빛이 없는 어두운 밤이기에 별들의 숫자가 더 많아 보이고 또 커 보인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 축일이다. 공현이라는 의미는 입증, 또는 나타남이다. 그래서 주님의 공현 이란 주님께서 공적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냄을 말하며,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에게 드러내셨는 지를 전하고 있다. 사실 성탄은 하느님께서 한 아기, 즉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한 아기가 태어났고, 그 아기는 자라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또 우리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축일이다. 오늘 주님의 공현 축일은 하느님이 주신 그 생명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기념한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놀라운 동방박사들의 베들레헴 방문사건이 사실인가 아닌가를 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동방에서 박사들이 베들레헴에 왔다는 오늘의 이야기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예수님 이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거부했고, 이방인들이 먼 곳에서 찾아와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살아 계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 활동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그분을 배척하고 죽여 버렸다. 그 후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방인들에게 의해 받아들여 졌음을 미리 말하고 있다.
주님의 성탄소식이 우리게 반가운 것은 화려함, 기쁨 혹은 영광 이런 단어 보다 오히려 어둠, 가난, 더러움의 우리에게 오신 구세주이시기에 반갑고 기쁘다. 만 왕의 왕이신 그분께서 휘황찬란하고 화려함 속에서 태어나지 않으시고 어둠과 가난 그리고 더러움과 시끄러움 안에 태어나셨음은 우리의 어둠, 가난, 더러움 그리고 시끄러움 안에 태어나셨다는 사실이기에 감사하고 기쁜 일이다.
주변 빛이 화려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서는 사람들이 구세주의 별빛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보지 않고 있었다. 땅의 기쁨을 누리며 바빴기에 볼 틈도, 볼 필요도 사실 없었다. 하지만, 어둡고 한적한 곳에서 별을 찾은 동방박사들은 구세주의 별빛을 따라 구세주를 찾을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일상 한가운데서도 희망을 상징하는 구원의 별이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인도한다. 생각지도 못한 어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슬픔 혹은 지독한 외로움과 마음의 시끄러움 안에서 희망의 구원의 빛이 보이는 법이니 참 세상은 아이러니 하다.
세상이 새로운 한 해를 맞이 하기 위해 숫자를 세어 기뻐하던 세계의 큰 도시들의 화려한 불빛들과 사람을 죽이려 쏘아 올린 무자비한 폭탄의 섬광과 아우성이 겹쳐 보이는 현실에서 그분이 누워 계신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 보니 얼마나 슬픈 현실인지 차라리 십자가 위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가 그려진다.
우리 성당의 아기 예수님의 구유 바로 위에는 구유보다 더 큰 십자가가 달려있다. 성탄은 빛의 축제이니 당연히 기쁨과 환희의 축제인 것은 맞지만, 그 빛, 기쁨, 환희는 영혼을 위한 것이지 단지 우리의 육체적인 기분을 흥겹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번 휘황찬란하게 꾸며진 구유 앞에 무릎 꿇고 사진 찍는 것으로만 충분하지 않다. 이제 성탄의 기쁨과 감사를 마음에 간직하고, 또 다시 골고타 언덕이란 신앙의 정점을 향해, 예수님께서 지셨던 십자가란 우리 인생의 마지막 의미를 향해 다시 먼 길을 떠날 순간이다. 언제까지 한없이 구유 앞에서 머물러 있을 수만은 없다. 이제 구세주를 뵌 기쁨을 가슴에 담고 또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가야 할 때다. 그래서 주님의 공현은 우리에게 또 다른 떠남을 요구한다.
별은 우리들에게 주어졌다. 우리의 이기심과 욕심의 구름이 걷히면, 하느님 말씀의 별은 보인다. 그것을 향해 우리는 움직여야 한다. 헤로데와 율법학자들 같이, 오늘의 통치자와 종교 지도자들의 엉뚱하고 때때로 간교한 생각도, 말씀을 찾는 우리의 길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그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움직이는 우리의 삶 안에 하느님은 숨결로 우리 안에 계신다. 하느님을 향해 가야 한다. 우리가 갇혀 살고 있는 이기심의 따뜻하고 화려함을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 우리의 어둠인 죄도, 받은 상처의 시끄러움도, 모두 뒤로하고 떠나야 한다.
하느님 없이도 잘 돌아가는 화려한 세상이고 각자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아도 관계없는 환한 세상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그런 삶 안에 ‘흙과 먼지’ 뿐이라는 허망을 알아채는 이들이 믿는 이들이다. 어둠을 찾아 그곳에서 별을 보고 그것을 향해 우리를 움직이게 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