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2일 대림 제 4 주일 Fr 김두진(바오로)강론

 

12 22일 대림 제 4 주일

신부님 참 행복하시겠어요.” 신자들에게나 비신자들 에게나 가끔씩 듣는 말이다. 신부라는 삶, 무엇을 보고 행복하다고 얘기하는 것일까? 세상 걱정 없이 사는 것 같아 보이고,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자식 걱정 없어 보여서 그런 것일까? 신부들도 다들 이만저만한 고민 걱정 그리고 고생하며 사는데 말이다. ‘행복이란 말은 고민, 걱정, 고생, 고통의 반대말이 아닌듯하다. 오늘 엘리사벳이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다면서 마리아에게행복하십니다.’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마리아에게 실제로 이루어져 마리아는 평생을 고생하며 살았다. 처녀 잉태로 주위의 곱지 못한 시선을 받았고, 돌로 쳐 죽임의 위협도 있었다. 남편이 없는 것처럼 살아야 했고, 어렵게 얻은 자식은미친 놈소리를 듣고 다니더니반대를 받은 표징이 되었고, 자신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팠다. 해서행복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하고 누가 노래했는지도 모른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이 수신인이다. 주님은 두 사람이 등장하는 2 인극처럼 베들레헴에게 말을 건넨다. 무능하고 불성실한 유다의 목자(임금)들을 대신하여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미카 5,1) 오늘처럼 베들레헴이 지명이 아닌 사람의 이름처럼 느껴지는 때도 없다. 주님은 마치 그 '베들레헴'이 사람인양 그 곁에 앉아 말씀하신다. 그리고 베들레헴은 수줍은 처녀처럼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 말씀을 듣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 그저 주님이 말씀하시니 모두 옳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이다.

 

엘리사벳은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 지리라 믿으신 분!" (루카 1,45) 하고 마리아에게 말한다. 조건 없이 상대방을 믿어주는 신뢰가 성경의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고' 생각해보면 여기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이런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 위에 구세주께서 베들레헴에 탄생하실 것이다. 그러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곧 소나 양 또는 곡물을 희생 제물이나 봉헌물로 바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 봉헌하시기 위해서 였다고 고백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기의 모습을 취하여 평화의 임금으로 오시는 그분의 탄생에는 이렇게 이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전제되어 있다.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놀라운 신비! 그래서 오늘 미사 본기도에서 우리는 "주님, 천사의 아룀으로 성자 그리스도 사람이 되심을 알았으니,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은총을 저희 마음에 내리소서." 하고 기도한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탄생하시는 주님의 성탄, 엄청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아드님께서는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기꺼이 인간이 되어 오신 것이다. 아담과 하와의 첫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하느님을 떠나와 비참하게 되었고, 이 인간의 근본적인 구원은 새로운 인간이 나타나서 하느님 아버지께 완전한 순종을 함으로써 구원을 되찾을 수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러 왔습니다.”(히브 10,7).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하느님 곁을 떠나서 비참하게 살게 된 인간을 찾아서, 새로운 인간이 순종으로써 비참한 인간을 구출하기 위해서 아드님께서 성부께 순종하시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의 어머니는 새 하와이시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태중에 자리 잡고 하느님 아드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시는 신비로운 육화를 맞이하신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세상에 오시는 예수님께서 장차 겪으실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성탄이 즐거운 분위기라면 파스카 성삼일은 장엄하고 진지하다. 부활의 기쁨과 성탄의 기쁨은 그래서 서로 다르다. 성탄의 아기 예수님께서는 구유에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믿는 이의 마음에도 오신다. 내 마음에 오시는 주님을 깨닫지 못하면 누워 계신 구유의 예수님은 그저 성탄 장식에 불과하다.

 

주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죽음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아기 예수님의 오심과 구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희망하며 사는 이에게는 더 엄청난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해서 우리는 기도한다. 오소서, 주님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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