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9일 연중 제 14 주일
세상을 살다 보면 참으로 감사할 일이 많다. 부모님의 사랑 이나 형제들의 우애, 이웃의 도움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다. 이때에 우리는 고마운 마음을 담아서 감사를 표현한다. 예수님께서 오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다. 주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 고 하는 자들 보다 철부지들을 선택하셨음에 감사드린다. 터무니없는 자만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보다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철부지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것이다. 이 기도 말씀은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본 요한의 제자들이 그분의 힘을 믿게 되고 나서 드린 감사의 기도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즈카르야는 평화를 가져올 메시아에 관해 예언한다. 메시아가 오시면 이스라엘의 포로가 된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이스라엘은 완전히 회복될 것이라 한다. 주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시고, 그들을 괴롭히던 이들을 심판하시고 정화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전쟁을 없애시고, 온 민족에게 평화를 선포하 것이며 주님의 통치하심은 온 세상 끝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 예언한다. 즈카르야 예언자는 이런 일을 시작하는 메시아야 말로 진정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 힘 있는 임금이심을 강조한다. 그런데 그분의 모습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분께서는 당신 힘으로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시는 분임에도 겸손하시기에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우리말로 “겸손하다.”라 번역한 히브리어는 “아니”라는 단어로 본래 핍박 받고, 가난하다는 것을 뜻한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진정 힘이 있으신 그분께서 가난한 모습으로, 핍박 받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다는 말이다.
실제, 예수님께서는 마태 21,7에서 암 나귀와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일이 즈카 9,9와 이사 62,11의 예언이 이루어지기 위해 그렇게 된것이라고 강조한다. “딸 시온에게 말하여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암 나귀를, 짐 바리 짐승의 새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마태 21,5) 이렇게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그분께서는 “아니”라는 말이 알려주듯이 핍박 받고 철저히 가난한 모습으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온유한” 모습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당신에게 배워야 비로소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시며, 당신의 멍에는 편하고 짐은 편하다고 말씀 하신다. 사실 이 말씀을 하신 배경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방법이 예수님과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 간에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당대의 사제들이나 율법 학자들이 하느님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하느님 계명을 완벽하게 지키려 노력했지만, 이 점이 오히려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계명과 율법만을 바라보니 그만 율법 자체에 얽매이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안식일 준수였다. 유다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심지어 구약 시대에는 안식일을 맞아 일하지 않는 동안 적에게 속수무책으로 학살당하기도 했다. (2마카 5,25-26 참조). 안식일에는 불을 붙이거나 끄지도 못하고, 빵 굽기, 바느질마저 금지하였기에 가난한 이들에게는 너무나 큰 멍에였다. 이렇게 율법에 얽매어 사는 그들에게는 하느님은 두렵고 무서운 분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힘들고 무거운 율법의 멍에를 풀어주시고자 하신다. 지킬 수 없는 형식적인 계명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돌려주시려는 것이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마르 2,27) 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형식보다 율법의 근본정신을 강조하심으로 하느님을 믿는 것이 쉽고 편안 하다고 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 23) 하지만 예수님의 핍박 받는 모습, 가난한 모습을 보면 그분의 멍에가 그리 편하고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시면서 당신처럼 “온유한” 사람들 만이 진정 약속된 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 들어가서 살게 될 것임을 강조하신 적이 있다. (마태 5,5)
좋은 일을 하던 나쁜 일을 하던 일을 하면 지치기 마련이다. 쉽게 말해서 가장 좋은 일 사랑도 하기에 힘 드는 법이다. 나쁜 일을 하는데도 힘이 들고 좋은 일을 하는데도 힘이 든다. 그러나 큰 차이점은 나쁜 일은 힘이 들고 힘이 드는 만큼 자신을 파괴 하고, 좋은 일은 힘이 드는 만큼 보람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쁜 일이 반복될수록 거부하기 힘든 중독성이 있는 것처럼 좋은 일 역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보람이라는 설명하기 힘든 뿌듯함과 기쁨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보람이라는 선물은 첫 인간이 창조될 때부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심어 놓으신 보물이다. 이 보물이 행복한 마음이다. 삶이 아름다워도 그 삶에는 어려움과 고단함이 있다. 저절로 얻어지는 아름다움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 사람들,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삶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은 이 길을 기꺼이 따라 나선다. 어찌 보면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만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나서는 철부지가 될 수 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이야기하듯이 하느님의 영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머무는 선택된 이들 만이 성령 안에 있게 되고, 그리스도께 속하게 되어 진정 온유하고 겸손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이들 만이 진정 부활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복음 환호성의 노래가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 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알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