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3일 연중 제 12 주일
Windy City. 시카고의 별명이다. 시카고의 별명 답게 바람이 많이 분다. 특히 올 초여름 바람이 심하게 불고 돌풍에, 토네이도까지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심하게 불 때면 으레 폭우도 함께 온다. 이렇게 바람과 폭우가 쏟아질 때 나는 성당주변을 살펴본다. 혹시 물이 넘치는 곳은 없는지, 성당에 물이 들어오지 않는지, 그러다가 길가에 서 있는 저 큰 나무가 부러져 사제관을 덮치면 어떡하지? 혹시 성당 종탑이 바람에 날리면 내 방을 덮칠 텐데 하는 걱정이 든다. 아직 한 번도 넘어져 본 적이 없는 종탑을 걱정하고 있다. 참 한심한 신부라는 생각이 들어 부끄러웠다.
두려움에는 두 가지의 종류가 있다. 마땅한 두려움과 쓸데없는 두려움이다. 마땅한 두려움은 경외심을 낳으며, 쓸데없는 두려움은 공포심을 유발한다. 마땅히 가져야 할 두려움은 인간에게 자기 한계와 겸손을 일깨우는 지혜와 신앙을 만들어 주지만 쓸데없는 두려움은 걱정의 원천이 된다. 걱정에 사로잡히게 되면 불안해지고 마음이 흔들리며 판단력이 흐려지고 망상에 사로잡힌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탄 배에 거센 풍랑이 밀어닥치자 제자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겁을 낸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뱃고물을 베개 삼아 주무시고 계신다.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걱정하는 제자들과 배를 집어삼킬듯한 풍랑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고 주무시는 예수님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결국 제자들은 두려움을 안고 예수님을 흔들어 깨운다. 예수님과 한 배를 탄 제자들에게는 눈앞의 현이 위험하고 다급한 일이었기에 예수님의 현존은 그들에게 의혹이 되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깨우는 것은 자신들이 처한 위태한 상황에 대한 다급한 불평이었다. 두려움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용기를 내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하고 성장하도록 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아직도 제자들의 믿음은 더 자라나야 하기에 주님께서는 그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신다. 예수님께서 잠에서 깨시어 바람을 꾸짖으시는 말씀 한마디에 다시 모든 것이 고요하게 제자리를 찾는다. 모든 것이 잠잠해졌지만 제자들은 또 다른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기에…?”
풍랑 앞에서 제자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공포심이었지만,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난 후 그들의 두려움은 주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바뀌게 된다. 믿음은 공포심을 없애 주고 경외심을 길러 준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알면 알수록 그분에 대한 경외심도 커간다.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커갈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겸손은 하느님을 경외 하는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항해 중에도 때로는 비바람도 만나고 폭풍우도 겪게 마련이다. 우리가 저어가는 인생의 배에는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무게에 힘 겨워하고 있을 때 또 두려움과 걱정이 밀려와 숨죽이고 있을 때 주님은 마치 잠을 주무시는 것처럼 멀리 느껴지고, 때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풍랑 속에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처럼. …..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사는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결코 주저앉거나 물러서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치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낸다. 사랑은 두려움을 넘어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고 주어진 현실을 기쁘게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우리가 부족한 믿음일지라도 주님을 흔들어 깨울 수 있다면 주님은 우리의 쓸데없는 두려움을 없애시고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과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굳은 믿음은 두려움을 넘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매일매일의 삶은 새로운 출발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를 두고 이렇게 증언한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