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요 며칠사이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시카고의 봄비는 조금 심하다 싶을 정도로 바람도 많이 불고 번개와 천둥을 동반하지만 봄을
재촉하는 비입니다. 바짝 마른 땅과 식물에게 생명을 주는 봄비는 우리 모두의 생명 줄입니다. 겨우내 말라있던 나무 가지에 물을
주고 뿌리에 생명을 전달하는 귀중한 섭리입니다. 또한 봄에는 바람이 많이 부는데 이 봄 바람이 가지를 흔들게 하여 생명의 물이
가지 끝까지 뻗치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이런 자연의 섭리 안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고 뿌리가 단단해져 나무는 푸르름으로 다시
나게 됩니다. 모든 식물들이 겨우내 죽음의 잿빛에서 봄의 푸르름으로 단장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구체적인 증거를 보기를 원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사도 토마스가 믿지 못하는 것처
럼 보이지만, 우리 모두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볼 수 있다면 또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쉽겠습니까? 무엇을 믿기 전
에 구체적인 증거를 원하는 것은 모든 이들의 바람일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볼 수도 또 느
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쉬운 설명을 한다 한들 부활에 대한 이론은 머리로 납득되지 않습니다. 해서 많은 이들이 부활에
대해 의심과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 토마스처럼 말입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의심 많은 토마스"는 증거 없이 절대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사도 토마스가 믿음
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다른 제자들의 말만 듣고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 드리려 하지 않았을 뿐이고, 구체적인 증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상처들을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기를 원했습니다. 사실 아무도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시리라곤
생각치도 못한 일이 었음을 생각해 볼 때 토마스의 이런 태도는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한 후 온 마음으로 열정적인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의심은 무엇입니까? 의심은 또 다른 의미에서 관심입니다. 관심이 없다면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신앙에 대해 의심한다면 그것은
믿음을 굳건히 하려는 시작입니다. 의심을 붙들고 고민할 때 그 의심은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신비의 루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토마스의 마음 안에는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부활이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희망찬 관심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토마스는 다른 사도들의 부활에 대한 소식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너무 믿
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믿게 해달라는 희망찬 외침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의 체험 후 온 마음을 다해 열정
적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사실 오늘의 독서는 부활 성야 때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더 깊은 신앙으로 이끄려는 교회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들은 새로 영세 받은 이들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중요합니다.
"백성들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 욱 더 늘어났다." 사도행전 5,13-14
첫 번째 가르침은 우리에게 전해 내려 온 종교적 신앙을 후세에게 물려 줘야 할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가는
이렇게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저의 군인시절 말년에 잠시 군종병으로 있었습니다. 그때 군종신부님이 제게 하신
말씀을 저는 아직도 기억합니다. "너는 그냥 군인이 아니다. 너는 가톨릭을 대표하는 군인이다. 너의 행동거지가 가톨릭의 신앙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 부활의 증인으로써 가지는 책임이 있습니다. "천주교우의 집"이라 써 붙인 명패를
통해 이웃에게 내가 누군지를 자랑스레 말하고 있기에, 자동차에 자랑스레 달아놓은 묵주가 혹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묵주반지가
내가 누군지 말해 주고 있기에, 우리의 말과 행동은 천주교 신앙을 대표하는 것이 됩니다. "무슨 신자가 저래?" 혹은 "역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우리 삶의 모습을 본 이웃들의 반응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는가를 통
해 "우리는 주님을 보았습니다."라고 부활의 신앙이 선포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은 주님 안에서 구원을
보고 부활 하리라는 믿음을 갖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과 기쁨을 본 후세들과 이웃들이 자기들도 예수님을 보게 해 달라고 우리게
청하게 될 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의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요한 20,24
두 번째 가르침은 공동체적 삶입니다. 그리스도 공동체가 우리의 삶 속에서 하여야 할 역할에 관한 것 입니다. 공동체가 기반을 이루
는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집단에 소속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구성원의 한 사람이 됨으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서로
에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게 됩니다. 부활사건 후 예수님께서 나타나실 때마다 늘 공동체적인 차원이 있었습니다. 사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된 것도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토마스가 공동체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하
는 것이 믿음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인가?”라고 물어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명확히 "네"입니다. 왜냐하면 성당에 나
와 전례에 참석하고 공동체적 찬미를 드리는 것은 신앙 안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는 계명을 뛰어 넘어 그리스도의 각 지체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 몸을 이루어 내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 주는 것이 됩
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각 지체가 모여 그리스도의 거룩한 모습이 완성 될때 우리는 공동체적 찬미를 드림과 동시에 그분의 부활
을 선포합니다.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보고서야 믿는 믿음 탓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지 않고 믿는다 고백하면서 믿음의 삶을 살아낼 수 없으면 이것은 탓해야 하고
지탄 받아야 할 신앙이 됩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토마스의 실수는 보고 믿고 싶은 믿음이 약한 우리들에게 위로가 되지만,
반대로 토마스의 고백은 우리 신앙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Fr. 김 두진(바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