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금 반지와 탐욕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제게 주신 18금반지가 있었습니다. '눈 감고 아웅'하는 마음이겠습니다만, 수도자이며 사제인 내가 손가락에
금반지를 끼는 것이 부끄러워 목에 걸고 다녔습니다. 그 금반지는 제게 어머니란 상징이었습니다. 누가 내게 달라고 해도 줄 수 없는 것이었고, 누가 아주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와 바꾸자 해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반지였습니다. 아주 비싸거나 멋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가 생각 날 때 나도 모르게 목걸이를 만지는 습관이 그 때에 생겼습니다.
그러던 소중한 것을 뉴욕에 살 때 잃어버렸습니다. 얼마나 어머니께 죄송하고 허전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그 금반지는 내가 끼지 못해 목에 걸던 것이었고 또 신부에게 금반지가 무슨 소용이냐 싶어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어머니께 죄송함과 허전함이 머물러 있는 것을 보니 내게 소중했던 반지는 맞습니다. 금반지 자체는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는 어머니란 상징이 머물러 있던 반지여서 무엇보다도 소중했었습니다. 아무튼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주우셨거나 가져가신 분이 잘 쓰셨으면 좋겠습니다.
성사는 상징입니다. 성체성사도 같은 의미를 둡니다. 상징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나타내며 우리는 주님의 몸을 받아 모시고 주님의 피를 받아 마십니다. 물론 이 말은 성체성사가 상징 그 자체로 끝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시는 신앙의 믿음도 필요하지만, 우리가 그분의 삶을 살아낼 때 성체성사는 우리게 큰 힘이 되고 의미가 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성체만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해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하나이다." 미사 때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고백이라 뜻을 헤아리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지만, 이는 교회의 신비스런 신앙 선포인 것입니다. 우리가 매 미사 때마다 드리는 이 신앙의 고백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어떻게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선포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전단지를 들고 거리로 나가, 성서와 메가폰을 들고 사람들에게 "불신지옥!"을 외치자는 소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를 받아먹고 마셨으니, 성체의 힘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것,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고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도록 실천하는 선행이 복음 선포의 힘이 됩니다. '세상에 외치고 싶어 주님이 누구신지' 하는 성가처럼 우리의 그리스도적 사랑의 실천은 불신지옥을 외치는 강압적 선교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참 복음의 선교가 될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하나를 소개합니다. 벌써 오래 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2006년 5월 정부의 통계청에서 발표한 한국종교의 교세라는 자료를 보면, 한국인중 무종교인 사람이 47%, 나머지 53% 의 인구가 가톨릭과 불교 그리고 개신교 신자로 나뉩니다. 통계청의 발표에서 모두가 다 놀란 것은 조용하기만 하고 별로 적극적인 선교도 하지 않는 가톨릭 교우의 증가세가 타종교보다 월등히 높은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참고로 지난 10년간 가톨릭은 74.4% 증가세를 보여 514 만 명, 불교는 3.9% 증가세를 보여 1,072만 명, 개신교는 오히려
1.6% 줄어 861만 명이었습니다.
이런 결과에 가장 놀랬던 사람들은 오히려 가톨릭이었습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우리가 이렇게 교세를 확장하게 된 것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기 때문" 이라고들 했습니다. 무기력해서 아무것도 못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생활양식과 철학 혹은 그들 나름대로의 믿음을 존중하기에 선무당 사람 잡듯이 전교를 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즉 식민주의적인 선교가 아니라 조용히 몸으로 생활로 보여주는 모델이 하느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우리는 제 1독서에서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인생이 이토록 아름다운데 왜 모든 것이 허무가 됩니까? 그에 대한 답은 2독서에 나와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을 위한 삶도 중요하지만 그 삶이 기쁘고 의미 있는 이유가 내 자신만을 위한 재물이나 권력이라면 이 모든 것은 다 없어지고 말 것이니 허무 그 자체가 아니겠습니까? 권불십년이라 했으니 권력이 영원한 것도 아니고 재물이 많아 창고(은행)에 쌓아 놓는다 해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이런 것에 삶의 목적을 두면 삶 자체가 허무가 될 뿐이라 합니다. 해서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라고 사도 바오로는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유산분쟁에 휘말린 사람에게 일갈 하십니다.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재산 관리인 혹은 중개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즉 예수님은 "왜 나에게 아래의 것을 물어보느냐 위에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제 2독서에서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말하면서 탐욕은 우상 숭배라고까지 말합니다. 우리게 있는 탐욕이 무엇이 있을까요? 내 자신을 버리는 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숭배하는 것은 참 하느님일까요 아니면 우리의 탐욕일까요?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게 질문합니다.
재물을 모으기 위해 우리는 피땀을 흘립니다.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재물이 우리 삶에 목적이라면 탐욕에 가득찬 우상 숭배자일 뿐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경고합니다. 재물은 세상을 위한 재물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재물이라는 창고에 갇히게 되면 하느님은 멀어지고 하느님이 아닌 것, 즉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무엇에든 갇혀있으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를 위한 것에만 갇혀있으면,
자유를 잃어버리고 '허무로다, 허무!'하며 탄식하게 될 것입니다.
아직도 가슴에 남아있는 어머니의 반지는 어쩌면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고 잃어버린 것이지 싶습니다. 어머니가 주신 것이라 소중하긴 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면 어머니도 반지도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나저나 여러분의 창고는 얼마나 큽니까?
김 두진(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