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에……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지 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인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솔뫼 마을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 아버님과 어머님을 떠나, 머나먼 나라에서 갖은 고생을 다 겪었는데 떠날 때 그의 나이 16세(1836년)였습니다. 1845년 8월 17일 25살에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은 신부님이 되셨는데, 우리나라 교회의 한국인 최초의 신부님이셨습니다. 불행하게도 신부님이 되신지 1년 1개월 만인 1846년 9월 16일에 새남터에서 26살의 젊은 나이로 순교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모든 이를 위해 예수님의 뒤를 따라 훌륭하게 순교하셨습니다.
이러한 순교의 최고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우리 인류를 위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1-22)라고 말합니다.
순교, 즉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것은 형제와 부모의 사랑을 뛰어넘는 더 큰 사랑을 사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나와 가까운 가족, 친지, 친구, 직장 동료들 같이 자주 만나고 생활하는 사람들과 갈등을 겪고 삽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이런 갈등 안에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통해, 순교의 삶인 자기 죽음의 순교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이런 갈등과 문제를 겪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 죽음의 모범을 보며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신 김대건 사제 순교자와 함께, 우리도 일상의 삶에서 예수님과 늘 함께 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랐던 성인과 함께 순교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순교의 삶은 무엇일까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는 미국에서는 순교란 있을 수 없습니다. 순교를 택하는 것은 희생을 강요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승화하는 사랑의 기술이며 기쁨을 선택하는 지혜입니다. 순교가 가져올 영광을 계산하면서 순교하는 순간 더 이상 순교가 아닌 것처럼 사랑을 빙자하여 희생을 강요하는 것도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하고 산다고 믿으면 마음에 상처만 남습니다. 상처가 많기에 표정이 밝지 못하고 남을 경계하고 나만 힘들게 산다고 생각하며 남에게 부담을 지우는 사람들은 사랑의 가면을 쓴 강요된 희생 때문이지 싶습니다. 현대의 순교는 자기 죽음을 통해 드러나는 기쁨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성직자들의 수호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축일을 지내며 사제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제는 교회의 빗자루나 걸레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많은 이들은 걸레를 못마땅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걸레가 없으면 깨끗한 집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각 사람이 보기에 따라서는 사제가 잘나 보이기도 하고 못나 보이기도 하고 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 사제를 통해 미사가 봉헌되고 그 사제에게 죄를 고백해야 하고 그 사제를 통해 죄 사함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위해 성무를 집행하는 사제는 좋은 사제가 되기 위해 늘 기도하여야 합니다.
속담에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없다고 하는 것처럼, 사제도 신자모두를 다 만족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채우시지 못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사제 한 사람이 다 채울 수 있겠습니까? 사제의 입장에서 보면 신자들의 모든 바람을 다 채워주지 못하는 사제의 마음도 편치 않습니다. 어머니의 태를 열고 나온 사람들 중에 사람들의 욕을 먹고 살기를 바라는 이는 없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사제든 신자들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제 개인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사제직이 세상의 죄를 짊어져야 하는 것이기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기대와 멸시, 애정과 증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다 받아야 하는 것이 사제직이고 사제가 한 평생 짊어지고 걸어야할 십자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욕을 먹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어야만 하는 것이 사제직의 본질이 아닐까 싶습니다.
좀 더 좋고 잘난 사람이 사제가 되어 오기를 모두가 바라지만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 25) 하신 말씀처럼 잘난 사람들은 다 세상에 나가 똑똑한 사람으로 남고,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만 사제가 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들이 사제직을 선택하고 계속 사제로 사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다 때가 되면 사라지고 맙니다. 심지어 사제 자신도 죽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사제들 안에 남아 있고 바꿀 수 없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사랑과 주님을 향한 열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이것만이 사제를 사제답게 하고, 사제직을 계속 수행 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며 매력이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께서 옥중에서 쓰신 마지막 회유문을 인용합니다. “이런 큰 어려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너희가 감수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 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 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 천만 바란다”
형제 자매여러분, 교회의 모든 사제들이 항구히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죽어야만 가능한 주님의 사명을 완수 할 수 있게, 세상의 평판과 영예를 선택하는 악과의 투쟁에서 늘 승리 하라고 순교자의 모범이신 주님께 기도해 주시기를 겸손되이 청합니다.
김 두진(바오로)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