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부활주일을 마치고 다친 저를 도와주러 왔던 동생이 월요일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동생이 가고 난 다음 날 제가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한 걸음에 달려와 준 친구 신부님도 떠났습니다. 이들의 자비로운 마음과 봉사로 저는 아주 매우 편하게 아픈 시간을 보냈습니다. 두 사람이 떠나고 혼자 남은 사제관이 왠지 쓸쓸하게 느껴집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에 슬며시 겁도 나지만, 또 다시 기쁘게 살아가려 노력 중입니다. 떠나기 전날 김 길상 신부가 제게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친구야, 나는 네가 부럽다. 많은 신자들이 나에게 보여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나대신 네가 꼭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라." 제가 대답했습니다. "감사함은 내가 전하겠지만, 나에게도 해준 것도 아니고, 너와 내 동생에게 해 준 것인데 왜 내가 부럽니?" 나와 네 동생이 예뻐서 해 준 것이겠니? 신자들이 너를 보고 우리들에게 잘해 준 게 아니겠니? 해서 신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네가 부럽다."

 

오늘은 부활 2 주일로 '하느님 자비 주일'입니다. 교회는 2001년부터 부활 제2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2000년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널리 알려진 마리아 파우스티나 수녀(1905-1938)를 시성하면서 하느님 자비를 특별히 기릴 것을 당부하면서부터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사도로 불리는 성녀 파우스티나 수녀는 "오, 주님, 상상을 초월하는 주님 자비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십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의 말씀이, 강생하신 자비가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저희를 주님의 신성으로 들어 올려 주셨습니다. 이것은 풍성한 주님의 사랑이요, 주님 자비의 심연입니다"라고 절절하게 고백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생생한 희망을 주셨고, 또한 썩지 않고 더러워지기 않고 시들지 않는 상속 재산을 얻게 하셨습니다." (베드로 1서 1, 3-4)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만나서 변화되는 과정을 잘 밝혀줍니다. 즉 '생생한 희망'을 지니게 됐고, '불멸의 상속재산'을 누리게 된 것이며, 이를 위한 '거룩한 생활'(1베드 1,13-16 참조)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을 향하는 여정의 출발지와 목적지는 하느님의 자비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토는 "자비로이 부르시니(miserando atque eligendo)"입니다. 이는 교황님이 열일곱 살이던 해,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에 받은 고해성사를 통하여 느끼게 된 하느님의 자비 체험이 하느님 부르심의 시작이었음을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이런 교황님은 자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배고픔과 목마름에 주린 사람들, 벌거벗고 비참해지고 노예가 된 사람들의 몸에서, 감옥과 병원에서, 예수님의 상처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 상처에 손을 대어 부드럽게 어루만질 때, 우리 사이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상처에 손을 대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를 다정하게 치유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상처에 입을 맞춰야 합니다.”(교황 프란치스코, 2014년 3월 23일 삼종 기도)

 

부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발현하셨을 때에 토마스 사도는 그들과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분명치 않으나 공동체 모임에 불참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요한 20,25) 여전히 많은 이들이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를 ‘토마스의 불신앙’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는 당시에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부활에 대한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7),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상처를 통해서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된 토마스는 어쩌면 우리의 신앙을 대변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은 당시의 제자들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맞은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빈 무덤을, 그리고 예수님의 발현을 목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보지 않고도 믿는 이들은 당시의 제자들보다 지금 우리에게 더 어울리는 말씀이고, 이런 이들이 행복하다는 것 역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위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부활 이후 각 복음서는 다양한 제자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사명을 언급합니다. 마태오는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사명을, 루카 역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제자들의 사명을 표현합니다. 요한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명을 전합니다. 요한복음 21장은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와 비슷한 내용을 전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 안에서 요한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바로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그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양들을 돌보라는 권고와 함께 새로운 부르심을 전합니다. “나를 따라라.”(요한 21,19)

 

이처럼 다양한 사명은 앞으로 펼쳐지게 될 제자들의 활동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활동할 때에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님의 부활 역시 쉽게 믿지 못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단지 예수님에 대한 중요한 사건들을 전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복음을 읽는 우리 모두를 그 사건 (예수님과의 삶)으로 초대하는 드라마틱한 초대가 아니겠습니까?

 

교우 여러분 저는 사고로 인해 생긴 상처와 아픔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워갑니다. 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입니다. 불만으로 가득 찬 상처를 통해서 부활을 체험한 사도 토마스처럼 저의 상처가 하느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끼게 하고 또 우리 공동체의 모든 신자들로 부터 사랑과 염려를 받았음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하게 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자비는 이렇게 하느님을 증거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은 그래서 사랑의 표현이고, 부활의 증표입니다. 다시 한 번 아픈 저와 저의 친구 김길상 신부, 그리고 제 동생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사랑으로 제게 부활을 체험하게 하셨으니, 부활하신 주님을 다시 한 번 증거 하는 자비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함께 노력합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김 두진(바오로)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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