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일 연중 제 13 주일 (교황주일)
오늘 복음에서 ‘시원한 물 한 잔’(마태 10,42)이라는 말로 교회의 원칙적인 역할을 제시한다. 뜨거운 사막 지역
에서 시원한 물 한 잔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이기에 우물은 반드시 보호해야 할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나 우물 보호를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뚜껑을 닫고 열지 않아 사용 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우물은 필요 없는 것이 되어진다. 이는 복음을 지키기 위해 너무 방어적인 모습으로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삶의 현장과 멀리 떨어진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교회가 일상의 현장에서 세상의 작은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잔을 제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우물 뚜껑을 열 때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현실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 복음은 모든 인간이 기울어지게 마련인 본능적 가족애를 넘어서라고 초대한다. 가족을 소홀히 하거나 미워하라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사랑으로 시야를 확장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로서, 역시 하느님의 귀한 피조물인 모든 사람을 편애와 애착, 차별 없이 존중하고 받아들이라는 권고다. 이런 보편적 사랑에 눈을 뜨면 가족을 덜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기심과 대리 만족의 도구로 소유물처럼 이용 또는 집착하지 않고 온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가족 구성원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로서 존중과 사랑을 받아 마땅한 고귀한 존재임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제1독서에서는 엘리사와 수넴 여인의 일화를 다룬다. 나그네 대접에는 인간적 차원 외에 거룩한 차원이 있다. 수넴의 여인은 그 점을 확언하고 있다. “여보, 우리 집에 늘 들르시는 이분은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이 틀림없습니다. 벽을 둘러친 작은 옥상 방을 하나 꾸미고, 침상과 식탁과 의자와 등잔을 놓아 드립시다. 그러면 그분이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그곳에 드실 수 있을 것입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하였고, 하느님께서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그녀가 아들을 갖게 보답해 주셨다. 나그네 대접은 그것을 받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므로 생명을 살리는 행위다. 그 때문에 하느님이 아기(생명)를 나그네 대접에 대한 보상으로 내려 주신다.
이처럼 신앙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선행들은 하느님 말씀의 선포자가 되게 해줄 것이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박해 때문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라고 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두려워한다는 것은 온 힘을 다하여 고백하여야 할 자신의 신앙을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에 장애가 되는 것이 있다면 과감히 끊어버려야 한다고 하신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것은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광신적 차원의 신앙이 아니라 영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다.”(38절). 그래서 그분을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감수해야 한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하느님과 진리에 충실하신 그분 존재의 본질적 차원이었다. 즉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형제들을 위해 행동하셨기에 당신 자신을 위한 일에는 전혀 생각하지 않으신 자기 죽음을 말한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짐으로 스스로를 위한 삶이 아니라 자기 죽음의 실천을 통해 주변 사람을 위한 행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의 길을 철저히 따라야 하기 때문이며, 생존을 위한 타협이나 자신의 취향에 따라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져서는 안 된다.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40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행하는 것이 곧 당신에게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물론 파견 받은 자와 파견하신 분은 다르다. 사도들을 맞아들임으로써 복음 선포를 돕는 사람은 복음 선포 그 자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그가 내 제자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41-42) 여기서 맞아들인다는 말은 물질적 차원에서 맞아들이는 즉 수넴의 여인이 예언자 엘리사에게 했던 것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에 대한 나그네 대접의 의미이기도 하다. 즉 물질적 의미 외에 신앙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도구로 봉사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언자는 예언자로 인정을 받게 하고 옳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한다. 따라서 사도로 파견 받지 못했지만, 사도들이 받는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제 2 독서를 통해 이렇게 설명한다. 세례성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힘에 참여함으로 부활에 참여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의 죽음과 생명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므로 우리 안에서는 죽음과 생명이, 선과 악이, 하느님의 뜻과 세상이 원하는 것이 끝없는 투쟁을 벌이게 될 것이다. 이 투쟁에서 갈등을 겪어야 하는 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이다. 그래서 복음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는 합당하지 않다.”(38)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복음을 선포하는 거룩한 일이다. 또한 복음 선포자들에게 협조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같은 상을 받게 됨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을 선택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데 장애 되는 것을 걷어버리면 우리 또한 복음의 선포자로 파견 받은 사람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