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5일 성탄 대 축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 복음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서로 다른 두 가지의 소식을 전하고 있다. 하나는 로마 황제로부터 세금 부과를 위한 호구 조사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난하고 초라한 목자들에게 전해진 구세주 탄생에 관한 소식이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루카 2,1.3.6-7) 이 둘은 역사적으로 같은 시기에 전해진 소식이지만 전자는 서민들에게 더 이상 숨 쉴 자리마저 허락하지 않는 절망적 소식이고, 후자는 그들에게 새 생명을 주는 희망의 기쁜 소식이었다.
간절히 바라던 것이 깨지면 매우 실망한다. 이 실망감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 절망이 된다. 이스라엘이 그랬다. 끝없는 로마의 폭정과 탈취 그리고 유다 지도자들의 파렴치로 백성 모두가 고통과 절망감으로 몸부림 쳤다. 이때 하느님은 희망의 기쁜 소식을 전하시며 당신 백성 모두를 어루만지신다. “죄인들,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돈 없어 멸시 받고 천대받는 사람들 모두 나에게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이 기쁜 소식은 그동안 삶의 고통과 돌이킬 수 없는 절망감에 허덕이던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희망을 주었고, 버겁지만 다시 한 번 삶의 의미를 찾게 하였다.
임마누엘의 하느님이시라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셔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분을 기다린다.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지 못해서 매년 성탄을 준비 하는지도 모른다. 주님을 맞이한다고 말하는 것은 주님이 늘 우리 밖에 계시는 분이시기에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기다리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께 대한 희망은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게 한다.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과 미래가 새롭게 잉태되고(마태 1,23), 우리의 삶과 역사는 ‘임마누엘’, 즉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시간 속에서 새로워진다. 이것이 임마누엘 신앙이며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탄의 참된 의미이다.
우리 성당의 구유는 올해도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 되었지만, 예수님이 누우셨던 구유는 저렇게 예쁜 모습이 아니었다. 짐승들이 울음소리 때문에 시끄럽고, 짐승들의 분비물로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외양간이고 그 안에 자리 잡은 곳이 구유다. 만물의 왕이신 그분께서 그 구유에 누워 세상에 오셨다.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지 않고는 구유에 누우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는 일이다.
당시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 들은 끝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듯이 말이다. 그들은 잘난 사람들이다. 시끄럽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으며 하느님도 잘 믿고, 율법도 많이 알고 그래서 주님이 오신다면 자신만만하게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지식과 특권의식이 고개를 숙이지 못하게 해, 낮게 누우신 그분을 보지 못하게 했다. 헤로데 왕은 권력의 욕심에 사로잡혀 있어 다른 왕이 태어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고, 입으로는 나중에 가서 경배하겠 노라 했지만 마음으로는 이미 아기를 죽여 버렸다. 누구든지 나보다 더 낫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높으신 분들은 그래서 낮게 구유에 누우신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한다. 학식, 재산, 칭찬 이런 화려함에 속아 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 안에서는 구유에 누우신 그분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높은 데가 아니고 낮고, 더럽고, 냄새 나고, 시끄런 마구간에 누워 계신다. 우리가 이미 와 계신 분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면 구유에 누우신 그분을 경배하러 낮고, 냄새 나고, 더러운 마구간으로 향해야 한다. 우리 이웃 중에 참으로 냄새 나고, 더럽고, 시끄러운 마음을 가진 이들, 우리가 돌보아야 할 이들, 지금 이 순간 하느님께 울부짖는 이들, 우리가 함께 기도해야 할 이들 그래서 더불어 기뻐하고 더불어 행복할 수 있도록 그분의 고요함을 향해 발길을 돌려야 한다.
우리를 위해 강생하신 예수 안에서 과거의 생활, 소유 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옛사람과 얽힌 모든 삶은 다 버려져야 한다. 대신 새로워지려는 마음과 새로워지려는 삶의 의지로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마구간을 바라보며 하느님께 등 돌렸던 우리의 삶을 전환해야 한다.
성탄은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 소식은 사랑이 메마르고 이기적 사랑이 판을 치는 이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메시지이다.
이 사랑은 주는 만큼 받고, 받은 만큼 주는 그런 상호주의 사랑 (Give and take)이 아니다.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그냥 무조건 내려주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이며,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게 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하고 필요한 것인지 성탄으로 시작하여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 사랑을 완성하신다.
올해 성탄절은 예수님을 비루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게 만든 옛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으면 한다. 모든 사람에게 참 희망이 되시고 구원의 문을 열어 주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두가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